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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9

[중앙선데이] 언어 장벽 없애는 bbb의 기적, 그들은 지식 나눔에 중독됐다.

세계 유일 휴대전화 통역 자원봉사 #지난해 말, 영국에서 온 무함마드 하야 일행 6명은 인천국제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이태원 이슬람 교회를 가려는데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택시기사가 휴대전화로 누군가를 바꿔줬다. 반가운 아랍어가 들렸다. 3자 통화가 시작됐다. 왕복 택시요금이 합의됐다. 택시 기사는 예배 보는 시간 동안 무료로 기다려주겠다고까지 했다. 하야가 고마워하며 통역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통역해 주신 분은 이슬람 교회의 누구신가요?” “아, 저는 bbb 봉사자입니다. 한국에는 휴대전화로 무료 통역 봉사를 해주는 bbb가 있답니다.” #9월 중순, 프리랜서 태국어 통역사 신정빈(32)씨는 태국을 여행 중인 한국인 신혼부부의 통역을 돕고 있었다. 부부가 모터보트를 타다가 사고로 배에 흠집이 생겼는데 선주가 배 값을 물어내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400만원을 요구하는 선주를 “그만한 흠집에 너무 과하다”고 신씨가 부부를 대신해 설득했다. 한참 협상하던 중 선주가 신씨에게 “왜 빨리 현장에 안 오고 전화로 통역을 하느냐”고 물었다. 선주는 그가 태국에서 bbb 서비스로 전화를 걸어온 부부를 위해 한국에서 휴대전화로 통역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다. ‘바벨탑 이전’, 인류의 언어가 하나였던 시대를 지향하는 휴대전화 통역봉사단 bbb(before babel brigade).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우리나라의 특성을 살려 24시간 통역 봉사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 방문객의 의사소통을 위해 전개한 자원봉사 활동이 그 시작이다. 다른 나라엔 없는 이 활동의 아이디어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중앙일보 고문)이 냈다. bbb는 2003년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독립했다. 현재 3200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며 17개국 언어가 통역된다. 2006년 이후엔 해외여행객이 외국에서 걸어오는 전화에 대해서도 통역 서비스를 하고 있다. 서비스 이용은 2004년 5000건에서 지난해 3만2000건으로 늘었다. 올해는 5만 건에 이를 전망이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첫 출범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간단한 길 안내, 숙박 문의 전화가 많았다. 요즘도 택시기사가 손님의 목적지를 파악하기 위해 거는 전화가 가장 많다. 하지만 7년 남짓한 시간 동안 별별 사연도 많이 쌓였다. 60년 전 주소를 들고 전남 장성의 시골 마을을 찾은 일본 할머니, 만삭 모습을 석고상으로 남기고 싶다고 미대를 찾아온 영어권 임신부, 채식주의자인데 피자를 잘못시켜 피자 크러스트만 먹었다며 도움을 청한 미국인, 주차위반 딱지를 렌터카 할인권으로 착각하고 해프닝을 벌인 멕시코 남성…. 이계연(41·여·아랍어 국제회의통역사)씨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부터 종종 연락을 받는다. 사무소에서 ‘수상해 보이는’ 사람을 입국 심사할 때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bbb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정말로 입국 목적이 불분명한 경우들이 있어요. 잠재적인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는 일이라 매우 중요하지요.” 현행범에게 미란다 원칙을 경찰관 대신 고지해 준 적도 있다. 이씨는 “이태원 중동 음식점에서 전화를 걸어와 홍보를 부탁하는 경우, 꼭 취직하고 싶다고 한국인 사장님에게 부탁해 달라는 경우 등 매우 다양하다”고 말했다. 신규환(26·베이징어언문화대 졸업)씨는 “병원 구급차에서 전화가 걸려온다거나 갑자기 경찰서에서 ‘범인을 구속하길 원하느냐’고 물어봐 달라고 하면 당황할 때도 있다”며 웃었다. 중국에 우편을 보내는데 ‘화성시 동탄면’을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고 물어와 인터넷을 찾아가며 글자를 하나하나 일러준 적도 있다고 한다. 결혼이주 여성과 외국인 근로자가 급증하면서 bbb서비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늘었다. “세상에~” “빙고”가 무슨 뜻인지 늘 궁금했었다고 전화를 걸어온 인도네시아 근로자는 웃음을 자아냈다. 중국인 신부를 기다리며 중국말을 미리 배우겠다고 전화한 예비 신랑, 크리스마스 이브에 중국인 아내를 데리고 평화시장에 나왔다가 “기쁘게 해주려고 데려왔는데 생각보다 썰렁해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던 남편과 “괜찮다. 다음에 또 오면 된다”던 아내, 중국인 아내가 평소에 했던 말을 떠듬떠듬 흉내 내며 묻곤 “아~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이해하던 남편들은 bbb 봉사자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적셨다. 그러나 남편에게 맞았다며 전화한 베트남 여성, 가출한 아내를 찾는다는 남편의 전화가 bbb 홈페이지(www.bbbkorea.org)에 ‘가슴 아픈 사연’으로 종종 올라오기도 한다. 19세 이상 성인만 할 수 있어 bbb는 ‘지적 봉사’다.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봉사하기 어렵다. 주요 봉사자가 은퇴한 외교관, 전·현직 교수, 동시통역사, 해외 대학 졸업자 등인 건 그 때문이다. 대신 시간과 장소, 고령도 큰 문제가 안 된다. 일본어 봉사자인 홍대식(85)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은 “두 달만 지나면 우리나라 나이로 여든 일곱”이라며 “휴대전화와 외국어 실력만 있으면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봉사”라고 했다. 여섯 살·네 살 두 아들을 키우랴, 미술학원 강사하랴, 살림하랴 정신 없는 주부 정민정(33)씨도 5년 동안 유학을 하며 익힌 이탈리아어로 통역봉사를 한다. 정씨가 8년째 지속해 온 봉사를 남편이 최근에야 알고 나서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몰랐다.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bbb 봉사자=고급 외국어 인력’으로 인식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이주영 bbb 사무국장은 “만 19세 이상만 가능한데 외고 선생님이 ‘우리 학생들은 아주 우수하다’고 단체로 가입시켜 달라고 우긴다거나 어제 봉사를 신청한 사람이 그 다음 날 ‘bbb 봉사 증명서’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사무국장은 “응급 상황이나 조정 능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미성년자는 적합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얼굴이 되는 만큼 봉사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봉사자들은 “휴대전화로 봉사하면서 외국어 감각도 유지할 수 있다”고 bbb의 장점을 꼽았다. 베이징사범대에서 중국어과를 졸업한 한인실(26·여·회사원)씨는 “중국어 실력도 녹슬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했다. 신정빈씨는 “bbb 봉사 덕에 취업까지 했다”며 크게 웃었다. 사연은 이렇다. 입사 면접 중에 bbb 전화가 오자 신씨는 면접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통역을 잘 마치고 “죄송하다”는 신씨에게 면접관은 ‘합격’을 알렸다. 태국어가 유창한 직원을 구하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실력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해피엔딩이었지만 입사 면접관 앞에서 휴대전화를 받고 통역까지 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경우다. 하지만 대부분의 bbb 봉사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위급상황 많아 새벽에도 받아 영어 봉사자인 김선용(61) 하이젠모터 부사장도 그랬다. 김 부사장은 업무상 회의가 많다. 회의 중에도 bbb 전화는 ‘99.9%’ 받다 보니 괴소문도 돌았다. “bbb 통화를 하다 보면 ‘저는 통역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죠. 직원들이 그 말을 들었는지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웃음). 일일이 해명하기도 쑥스럽고….” 골프 접대를 하고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bbb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달리는 자동차 안이니 나가서 받을 수도 없고 또 하필 경찰서에서 온 전화라 내용이….” “위급한 상황일 가능성이 늘 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전화를 받게 된다”고 일본어 봉사를 하는 박정룡(50) 아주자동차대 교수가 bbb봉사자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새벽에 전화가 오면 고생스럽지 않냐고요?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오히려 반갑죠.” 전화 봉사는 한 달에 1~2번 꼴이다. 베트남어·태국어 등 수요에 비해 봉사자가 적은 경우는 1주일에 2~3번씩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다. 통화당 2~10분이 대부분이지만 예외도 있다. 프랑스어 봉사를 하는 황혜영(38·여) 서원대 교수는 “공항에서부터 이동하면서 궁금한 것을 차례차례 물어와 1시간이 넘도록 통화한 적도 있다. 힘? 전혀 안 들었다(웃음). 많이 도울 수 있어서 가장 기분 좋았던 통화”라고 말했다. 심창섭(63) 세계무역문화원 사무총장은 ‘찾아가는 서비스’도 한다. 우루과이·콜롬비아·멕시코 등에서 무역관장을 지낸 그는 스페인어 담당이다. 지난해 10월 그는 지하철에서 콜롬비아 여성 ‘난시’가 우체국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지하철 소음에다가 옆자리 소녀들까지 큰 소리로 떠들어서 전화기를 귀에 바짝 댔더니 뭐가 잘못 눌러졌는지 그만 전화가 끊기고 말았어요.” 전화가 다시 걸려오지 않자 그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114에 전화해 해당 우체국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마침내 난시와 다시 연결이 됐다. “에이, 지하철에서 내린 건 별일도 아니죠. 5분, 10분이면 되는데…. 저도 해외에서 아주 사소한 문제로 곤란했던 경험이 많거든요.” bbb 봉사자들은 한 푼도 받지 않는다. 도와준 사람들에게 나중에 인사를 받을 수도 없다. 대표 전화번호를 통해서만 연결되고 이름 없이 ‘bbb 봉사자’로만 활동하기 때문이다. 때론 거친 말을 하는 이도,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도 있고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해외에서 힘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간단한 몇 마디에 누군가의 힘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쁨’에 중독돼 기꺼이 전화를 받는다. 홍대식 한국능률협회 부회장은 “일본 경제인들이 bbb 서비스에 ‘이이데스네~’ 감탄만 하고 비슷한 서비스를 못 만들어 내더라. 휴대전화야 우리나라만큼 많을 텐데 아무래도 사람(봉사 인력) 문제 같다”고 말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