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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연합뉴스] 남몰래 휴대전화 통역하는 老학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외국인에 8년째 익명활동 한ㆍ일 월드컵을 앞둔 2002년 봄, 이어령(75)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네 살 아래 노학자와 얘기를 나눴다. 당시 크게 늘던 외국 방문객에게 휴대전화로 무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동을 벌인다는 이 교수의 말에 그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대뜸 자기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낯선 외국인의 전화가 쏟아졌고 ''''비행기를 잘못 탔다'''' ''''머릿니 잡는 약이 필요하다'''' ''''전세금이 너무 비싸다'''' 등의 고충을 영어로 들으며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도 보람이 있었고, 월드컵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통역 요청 전화를 받는다. 휴대전화 통역단체 한국BBB운동의 ''''원년 회원''''인 손봉호(71) 서울대 명예교수 얘기다. 손 교수는 17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외국어 실력으로 타국에서 말이 안 통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며 "사실 사람 속을 이처럼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기회도 흔하지 않다"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BBB는 통역이 필요한 외국인이 ARS(자동응답서비스) 번호로 전화하면 해당 언어를 하는 자원봉사자를 무작위로 연결해 준다. 통역자는 휴대전화 뒤에서 철저히 익명으로 활동한다. KBS 시청자위원회 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 사단법인 푸른 아시아 이사장 등 셀 수 없는 직함을 가진 손 교수도 여기선 ARS가 이어주는 노인 봉사자일 뿐이다. 보답은 외국인이 통화 막바지에 하는 ''''고맙다(Thank you)''''란 말이 전부다. "외국에 한국인이 거의 없었던 1960년대 유학을 했으면 그런 기억이 다들 있어요. 말이 안 통해 가슴을 치는 경험이요. 저도 프랑스 기차역에서 공중전화 토큰을 못 사 팔짝팔짝 뛰었어요. 이 때문에 (통역요청) 전화가 귀찮지 않아요. 한국인 이미지를 좋게 만들 기회라 다행으로 생각하죠" 손 교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통역 요청은 ''''길 묻기''''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 지명을 대며 주변 병원이나 약국, 주유소 등으로 가는 길을 자주 묻는다는 것. 그는 "우리 도로 표지판이 동네 주민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불친절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며 "외국인도 직관적으로 길을 찾을 수 있는 표지판을 만드는 등 이방인을 배려하는 정성이 우리 사회에선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국BBB는 현재 자원봉사자 3만2천여명이 영어, 일본어, 베트남어 등 17개 국어로 통역한다. 손 교수는 "초기보다 봉사자 수가 크게 늘면서 요즘은 전화 오는 횟수가 매주 1번 정도로 줄었다. 너무 안 오니 오히려 섭섭하더라"고 말했다. 한국BBB와 관련된 그의 작은 꿈은 ''''네덜란드어 통역''''이다. 네덜란드 자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화란어(和蘭語)도 잘하는데 네덜란드인들이 영어가 능숙해서 그런지 한국BBB에 이 언어 서비스가 없다"며 "언젠가 화란어 전화 통역도 한국에서 된다는 점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균 기자 기사입력 2009-11-17 05:34